식민지기(식민지시대, 일제강점기)의 공업정책
1920년대 중반 이후의 농업 불황 이후 한국의 산업 정책이 바뀌었다. 당시의 총독 우가기 가즈시게는 한국을 독자적인 재생산 단위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일본의 블록 분업적 입장으로부터 보면 일본을 精工業 지대로 하고, 조선을 粗工業 지대
Ⅰ. 식민지기(식민지시대, 일제강점기)의 임야소유권식민지기임야소유권의 정리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로는 권영욱(1965)을 필두로 신용하(1982), 강영심(1983·1984), 심희기 1991a; 배재수 외(2001) 등의 연구가 대표적이다. 그밖에 이 주제를 본격적으로 다룬 것은 아니지만 검토할만한 논저 또한 적지 않다
, 일반산업기계 및 장치, 사무 및 서비스용 기계, 가정용 기계, 기계 일반부분품, 전기기계기구, 전자 및 통신기구, 가정용 전기기구, 기타 경전기구, 조선 및 선박수리, 철도차량, 자동차 및 자동차수리, 기타 운송용 기계, 정밀기계 및 광학기구, 합성수지 제품, 기타 공업제품이 포함되어 있다.
3) 농가경제의 피폐
a) 농가수지 적자와 부채
1920년대 식민지 조선의 농가경제 상태에 대해서는 1925년 9월 내무국 사회과에서 발표한 「농가경제에 관한 조사」를 통해 알 수 있다. 이 자료에 따르면 지주를 포함한 전체 농가 호수의 46.6%에 해당하는 1,271,236호가 수지 적자였으며 지주와 자작농은
Ⅰ. 우리나라의 근대화
1. 근대화의 맹아 – 갑오개혁, 광무개혁
1) 최초의 근대화 시도 갑오개혁
한국의 첫 근대화 시도라고 볼 수 있는 1894년에 이루어진 갑오개혁에서는 중앙관제와 행정조직의 대대적인 개편을 비롯하여 다방면에 걸친 개혁이 이루어졌다. 조선왕조는 군국기무처를 입법권을 가
수지나 댐 같은 콘크리트 구조물들로 더 많은 수확량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기술의 도입으로 인해 농민의 삶이 윤택해 졌다고만 할 수도 없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수탈당한 농민에 있다.
이 시기에 조선 농민들에게 보급된 농업기술은 거의 강제적으로 보급 된 것이었다. 일본 기수들이
공업지대였다. 그리고 경기도의 경성과 인천, 경상북도 대구는 섬유와 기계기구 등을 생산하는 한국 최대의 경공업 지대가 되었다.
나) 수탈론의 입장
식민지시대의 한국공업의 생산구조는 한국을 일본 공업제품의 독점적 판매시장으로 개편하는 정책과 한국을 ‘대륙전진 병참기지’로 개
공업과, 소작농을 보호 육성하려는 정책이 아닌 대자본과 지주만을 위한 정책이 주를 이루었으며 산업발전의 이익은 민중에게 돌아가지 않았다. 결론적으로 일제의 한국 식민지 경제발전 정책은 통계적 수치나 대외적인 현상만으로는 도움을 준 듯 보이지만 결국 일본 자국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한 하
[1] 서론 : 일제식민지배정책사에 대한 개괄
경제적 제국주의의 보편적 식민지 지배원리는 ‘최소의 비용에 의한 최대의 수탈’이다. 이러한 경제적 수탈의 목적으로 서구 제국주의 열강은 탐험가, 선교사, 기업가 등 여러 부류의 사람들을 통하여 ‘개척’과 ‘문명화’라는 이름하에 새로운 영토
, 임야조사사업으로 빈농화를 더욱 가속화시켰고, 금융, 화폐정비, 회사령과 광업령에 의한 민족자본과 상품판매 시장과 지하자원 등의 광범위한 동화정책을 내세우고 이를 기만하기 위하여 교육, 여론, 종교단체를 통제, 회유함으로서 역사와 민족화를 말살하기 위한 정책을 시도하였다.